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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영화<학교 가는 길> 포스터/출처: 다음 영화 |
새벽 7시, 대형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버스 안에는 몸을 흔들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말이 어눌한 ‘이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타 있다. 겉모습만 보면 다 큰 성인 같지만, 이 아이들은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엄마의 도움을 받아 준비를 받아 학교로 등교하는 발달장애 학생들이다. 영화 <학교 가는 길>은 ‘왜 장애가 있는 학생들의 학교 가는 길은 이렇게도 멀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한다. 장애가 있는 지현이는 아침 6시에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한다. 지현이는 고등학교 재학 내내 하루 3시간씩 스쿨버스로 통학했다. 2020년 통계에 따르면 전국 182개 특수학교는 모두 과포화 상태이고 재학생의 46%는 왕복 1~4시간 거리를 통학한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강서구 특수학교를 둘러싼 갈등은 2015년 시작됐다.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공진초등학교가 학생 수 부족이라는 이유로 폐교되면서 그 부지에 서울시 교육청은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강서구에 특수학교가 없어 구로구까지 통학해야 했던 장애 아동과 학부모들은 환영했다. 하지만 허준 선생의 탄생 지역을 명목으로 국립 한방병원을 유치하겠다는 정치인의 등장과 그를 따르는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히며 상황은 어려워졌다. 영화는 강서구 특수학교인 서진학교 설립을 위한 주민 토론회,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시위, 장애인부모회의 투쟁, 서진학교 개교까지의 상황을 담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강서구민 아닌 사람 나가’라며 강서구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 앞에 무릎 꿇은 엄마들, ‘동정 구하는 거냐’, ‘더럽다’라는 말에 말없이 눈물을 훔치는 엄마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들의 사진이 특수학교 설립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이루어냈고 지금의 서진학교를 만들어냈다. <학교 가는 길>은 ‘세상을 바꾼 사진 한 장’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장애 아동이 학교에 다니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 눈물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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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세상을 바꾼 사진 한 장’. 2017년 9월 5일 강서지역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교육감과 주민 토론회에서 장애학생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주민 찬성을 호소하고 있다./출처: 유튜브 채널 '영화등대' 캡쳐 |
“여기 가뜩이나 임대아파트 맣고 저소득층 많이 몰려사는 동네인데”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강서구 주민들을 이기적인 사람들로 비난하지 않는다. 이 모든 서사의 시작에 있는 ‘공진초등학교’에도 차별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1990년 서울로 밀려드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정부는 가양동에 국내 최대 규모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 일대에는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노인, 탈북민 등 저소득층 주민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국가가 구역을 나누어 취약 계층을 집단 수용해버린 것이다. 공진초등학교는 저소득층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가 되었고, 임대아파트와 학군을 분리해달라는 일반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을 교육청이 수용하면서 공진초등학교에는 가양4,5단지 임대아파트 거주 학생들만 남게 되었다.
단순한 ‘학생 수 부족’이 아닌, 혐오에서 비롯한 공진초등학교 폐교이기에 ‘여기에 장애인 특수학교까지 들어서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는 주민들의 울부짖음에 마냥 비난의 눈길을 보낼 수 없는 이유이다. 요즘 들어 차별과 혐오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차별과 혐오의 경계를 선 긋듯 할 수는 없겠지만, 차별은 ‘너는 나와 다르기에 차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규정이지만, 혐오는 말 그대로 ‘너와 한 공간에서 숨을 쉬기조차 싫다’ 혹은, ‘너는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다’라는 뜻이다. 특수학교 설립에 대한 반대와 이 과정의 시작은 가난에 대한 혐오에서 찾아진다. 가난에 대한, 임대아파트에 대해 ‘너와는 같은 공기도 마시기 싫다’는 마음이 장애인에게 ‘너희들은 나와 같은 땅을 밟을 권리가 없다’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민주주의의 다수는 누구인가
한국인이라면 질리도록 듣는 말인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른다. 한 사람에 의한 통치가 아닌,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되어 지배하는 구조라는 것인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평등하다는 전제 아래에 더 많은 개인이 찬성하는 방안을 따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수많은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국민’을 규정하는 모호한 방식은 간편하게 ‘수’가 된다. 다수가 정의이고, 조금의 비약을 보태자면 목소리 큰 사람이 옳다.
다수의 힘이 폭력이 되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발견하게 되는가. 장애 아동들은 말을 하지 못한다. 시위하러 나온 엄마 손을 잡고 해맑게 웃는다. 그저 멀뚱멀뚱 앉아 있기도 한다. 그들의 목소리가 작다고 우리는 그들의 교육권을 너무도 쉽게 다르게 취급하지는 않았을까. 장애인의 불편은 비장애인의 불편보다 덜 심각하며, 장애인이 서울시민으로서 가질 권리는 비장애인이 서울시민으로서 가질 권리보다 덜 존중되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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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혜화역에 붙은 장애인 이동권 시위 구호/출처: 소진영 |
지난 6일 장애인의 이동권을 위해 시위를 하겠다는 장애인 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서울교통공사는 지하철 혜화역 2번 출구 엘리베이터를 폐쇄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금일 예정된 장애인 단체의 불법시위(휠체어 승하차)로 인하여 이용시민의 안전과 시설물 보호를 위하여 엘리베이터 운행을 일시 중지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노약자나 유아차 이용자 등 엘리베이터 이용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동권까지 침해했다는 항의가 이어졌다. 크랩에 따르면, 이에 대해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서울대병원쪽 엘리베이터는 정상 가동되었으며, 시위가 예정되었던 2번출구쪽 엘리베이터만 중지했다’고 답변했다. 서울 시민에 장애인은 없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나아가 다수인 비장애인과, 소수인 장애인 사이의 구분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이 결과적으로는 전체에 대한 억압이 되는지 보여준다.
‘시민’에는 장애인도 있다.
건축의 공공적 가치를 구현하며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우수한 건축물과 공간 환경을 장려하기 위한 상인, 서울시 건축상에 서진학교가 대상을 받았다. 이 상은 서울시 건축상 중 최고 권위를 가진다. ‘시민’ 불편을 줄이려 엘리베이터를 폐쇄한다는 말과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건물이라는 평가가 함께 공존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시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소진영(ESG기자단) sarkakore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