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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쉼표, 여행

기사승인 2021.04.25  0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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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나는 유난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2학년을 마치고 3학년에 진학하기 직전의 시기에 소위 ‘대2병’이라고 하는 증상이 나를 찾아왔다. 전공은 재미있었으나 인문대학 소속 학생으로서 전공에 대한 흥미만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하게 느껴졌고, 흔히 말하는 문과 진로 중에서는 마음이 가는 것이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 목표를 정해서 달려나가고 있었고, 나 혼자 길을 잃은 채 방황하는 느낌이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쉬지 않고 전공공부나 동아리 등의 활동을 해왔지만 모두 부질없게 느껴져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러던 중, 부산에서 군 복무를 하던 친구에게서 휴가를 나갈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이럴 때 나는 보통 안부를 묻고, 혹시 만날 수 있을지 일정을 조율해 보고, 시간이 된다고 하면 만나서 밥 또는 술을 함께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지쳐 있어서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고, 친구에게 충동적으로 휴가 일정에 맞추어 부산으로 가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친구는 흔쾌히 일정을 비워두겠다고 이야기해 주었고, 나는 당일치기로 부산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바다가 건넨 위로

 

기차에서 내려 친구와 인사를 나눈 뒤, 가장 먼저 간 곳은 송도해수욕장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유난히 바다를 좋아했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복잡한 생각들이 모두 사라지고 그 공간에 나만 있는 기분이 들어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곤 했다. 그래서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바다로 향하는 버스를 탔고, 창밖으로 바다 끝자락이 보인 순간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버스가 도착하는데 걸린 10분 남짓의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길게 느껴졌다. 버스가 멈추자마자 바로 달려가서 마침내 바다를 마주했다.

 

탁 트인 송도해수욕장, 직접 촬영

 

송도해수욕장은 비교적 한적한 곳이었고, 그런 곳에서 바다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비로소 일상을 떠나왔다는 실감이 났다. 바쁜 학기를 보내고 오랜만에 본 바다는 변한 것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바다가 그대로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세상이 나만 두고 앞으로 달려가는 것만 같았고 나 혼자 뒤처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 변함없이 나를 맞이해 준 바다는 천천히 가도 된다고 위로해 주는 듯했다.

 

행복해지는 시장의 음식

 

바다를 원 없이 눈에 담은 뒤에 점심을 먹으러 국제시장과 깡통시장으로 향했다. 부산을 몇 번 방문했지만 두 시장은 일정이 맞지 않아서, 혹은 동선이 애매해서 등의 이유로 매번 가지 못했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시장 구경을 하겠다고 결심했고, 출발하기 전부터 친구에게 말해 둔 결과 마침내 시장에 입성했다.

 

장을 보러 나온 지역 주민들과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 그리고 나처럼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로 시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런 곳을 걷고 있자니 활기찬 분위기가 전염되어 기분이 들떴다. 점심을 먹기 위해 방문한 곳이어서, 적당히 구경하다가 시장 끄트머리의 분식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부산에 왔으니까 부산 음식을 먹어봐야지 하고 물떡과 비빔당면, 그리고 밀면을 주문했다. 소박한 음식이었지만 시장의 분위기와 여행을 왔다는 사실이 어우러져 그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었다. 확실히 여행을 가면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행복해진다. 일상을 여행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잠깐 하고 웃어버렸다.

 

시장에서 먹은 음식들, 직접 촬영

 

추억이 가득한 책방 골목

 

점심을 먹고 서점들이 가득한 보수동 책방 골목으로 향했다. 요즘은 서점이라고 하면 교보문고와 같은 대형 서점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그 골목의 서점들은 서점보다는 책방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책을 가득 쌓아 놓고 판매하는 곳들이었다. 책들을 구경하며 골목골목을 누비다 보니 익숙한 책들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초등학교 때 교실에서 돌려 보던 학습만화나 고등학교 때 읽던 권장 도서들, 그리고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소설들이 곳곳에 보였다.

 

보수동 책방 골목의 대표 격인 보수서점, 직접 촬영

 

친구와 함께 책들을 가리키며 그땐 그랬었지, 하고 책과 함께 꽂혀 있던 추억들을 꺼내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마지막으로 읽고 싶은 책을 읽었던 때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예전에는 소설을 읽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었는데, 요즘에는 다른 일들로 바빠서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항상 다음에 읽지 뭐 하며 미룬 기억밖에 없었다. 돌아가면 좋아하는 책 한 권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여유는 갖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에서 벗어난 듯했던 야경

 

책방 골목을 나와서 저녁 식사를 했더니 기차 시간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자니 친구가 부산역 근처에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따라나섰다. 친구가 데려간 곳은 이바구길이었다. 윗동네로 올라가는 마지막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서 전망대에 섰더니 부산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마치 내가 부산에 있지만 부산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야경이었다.

 

이바구길 전망대에서 본 야경, 직접 촬영

 

야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평소에는 이야기하기 힘들었을 속마음이 술술 나왔다. 친구에게 최근의 상황과 감정을 털어놓았고, 친구는 묵묵히 들어주다가 참 힘들었겠다, 하고 위로해 주었다. 힘내라는 말이나 잘할 거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그런 것들보다도 친구가 툭 던진 그 말이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힘들어도 남들은 다 하니까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나에게는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아랫동네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점점 야경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꿈에서 깬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친구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기차에 몸을 싣고 부산에서 보낸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갑작스럽게 당일치기로 했던 여행이라 그런지 잘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일상을 떠나온 기분으로 신나게 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지칠 때는 어디로든 떠나서 잠시 쉬어가는 것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된 여행이었다.

이주경 바람 온라인 저널리스트 yess@li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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