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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먹고 살기 바쁘긴 한데요

기사승인 2021.04.03  22: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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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ixabay

 

세계 일류의 시카고 대학은 과거 ‘허친스 플랜’으로 당대의 이목을 끌었다. 1929년, 30살의 젊은 나이에 시카고 대학 학부 학장으로 부임한 로버트 허친스는 대대적인 학부 개혁을 시행했다. 그중 하나인 허친스 플랜은 학부생들이 늦어도 2학년을 마치기 전까지 고전 100권을 의무적으로 읽도록 하는 교육 정책이었다. 유럽의 고전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통 서적으로 구성된 도서 목록은 한국 내에서도 ‘시카고 플랜 리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출처: 고려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
출처: 서강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

 

오늘날 국내 대다수의 대학 역시 인문학 독서를 적극 장려하고 있다.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 우리는 ‘기적의 독서법: 영재 자녀의 첫걸음’과 같은 독서 교육 ‘붐’이 일었던 시대에 태어났으니까. 어릴 적 흙무덤 파며 놀기보다 집에서 책이나 읽던 태생 집순이가 바로 나였다. 덕분에 부모님의 속을 썩일 일도 없었다. 그렇지만 입시를 준비하던 십 대 끝 무렵엔 학교생활기록부를 채우기 위해 상경계열 권장도서만 억지로 들추게 됐다. 원체 책 버릇이 나쁘게 들지는 않았으니 꾸역꾸역 읽기는 했다. 그러나 진로 적합성을 위한 보여주기 식 독서에 싫증이 날 대로 났다.

 

대학 입학 후 몸과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도서관에 걸음 하는 날은 자연스레 많아졌다. 등록금이 아까워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려보자 싶었는데 그중 만만한 것이 마침 도서관이었다. 나는 방황하는 젊은이라면 꼭 한 번 거쳐 가야 한다는 하루키 소설에도 빠져보았다. 읽고 있으면 중세의 배고픈 지식인이 된 것만 같은 저명한 고전도 기웃거려보았다. (‘파우스트’는 2년이 지난 지금도 결말을 모른다.) 아무튼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중앙도서관이었다.

 

그렇게 몇 달간 문지방을 들락날락하고 나서야 나는 각종 독서 프로그램의 존재를 제대로 알아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입생 때부터 눈치채고 있기는 했으나 적당히 모른 척하며 살았다. 그때는 종이보다 다른 것에 눈이 가던 시절이었으니까. 다행히 지금은 몇 년 전보다 머리가 더 커졌다. 아는 게 힘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자진해 글자를 찾게 되는 요즘이다. 양질의 글로 인풋을 늘리고 싶은 욕심도 커졌다. 그런 이유로 나는 줄곧 재기만 해왔던 ‘인문학 40선 읽기’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이왕이면 함께 하자는 동문 A 씨의 권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각자의 ‘먹고 살기’ 바쁠 미래와 ‘마음의 양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인문학 40선 읽기 / 출처: 중앙대학교 ‘中讀’ 홈페이지
도서 목록 일부 / 출처: 중앙대학교 ‘中讀’ 홈페이지

 

Q. 저에게 독서 프로그램을 제안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우리가 무슨 내로라하는 ‘독서광’도 아니잖아요. (웃음)

 

독서에 미치지는 않았지만 특정 분야에 몰입하는 걸 좋아하니까요. 평소에도 어떤 사람이나 현상, 이미지에 과몰입 해서 토론하는 걸 즐기지 않나요. 책을 꾸준히 읽는 것도 무언가를 깊게 파고드는 데 도움이 돼요. 인문고전은 우리 역시 소화하기 어려운 책이지만 그래도 같이 읽다 보면 중간에 그만두지는 않겠다 싶은 생각도 있었답니다.

 

Q. (굉장한 인문학도 같으시네요.) 오늘날의 대학이 실용주의, 직업교육에 치중되어 있다는 평가가 많은데 그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 궁금해요.

 

취업이 안 되니 취업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죠. 당연한 수순이에요. 저야말로 무슨 설문조사만 떴다 하면 기타 항목에 ‘취업 지원 프로그램 신설’ 같은 걸 쓰는데요. 그렇지만 대학이 고등 교육기관으로서 ‘인문학’의 중요성을 경시하지 않으려는 게 느껴져요. ‘인문학적 소양’, ‘교양인의 자질’ 이런 건 홈페이지만 들어가도 나오니까요. 다만 저는 교육과정으로 제공되는 것을 넘어서는 학생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봐요.

 

Q. ‘개인의 노력’이라는 표현을 조금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독서가 ‘자기계발’의 영역인 것과 같은 맥락인가요?

 

비슷해요. ‘언제까지 떠먹여주는 것만 받아먹을 순 없다’라고 해야 할까요.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게 인간과 세계의 근간을 이해하고 이를 확장하는 데 목적이 있잖아요. 대학은 (우리가 신청한 독서 프로그램처럼) ‘계기와 도구’를 제공해 줄 뿐인 거죠. 인문학을 접할 환경이 마련되어 있어도, 이를 활용하여 플러스알파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노력이 분명 필요하다는 거예요.

 

Q. 그렇다면 본인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세요.

 

일단 도서관 프로그램 신청했고요. (웃음) 이건 책을 가까이 하겠다는 자기암시 같은 거예요. 저질렀으니 책임은 져야 하니까. 그리고 어떤 책을 읽으면 (완독하지 않더라도) 꼭 서평을 쓰려고 노력해요. 저는 자소서를 갈아엎다가 느꼈거든요. 내 이야기를 나의 말로 풀어쓰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사실을요. 서평과 독서노트는 ‘주어진 정보를 어떤 시선으로 각색할지’ 고민하고 연습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Q.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20대 대학생으로서 또래 청년들(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저도 제 밥그릇 챙겨보니 알겠어요. 이 시국 청년들이 제 한 몸 건사할 길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요. 그런데 저는 책 읽는 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더라고요. 시간의 세례를 받은 글 속에 남은 누군가의 고민의 흔적을 보고 있으면, 이런 내 인생도 문학처럼 느껴지고 위로가 돼요. ‘인문학(人文學)’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실감하는 순간인 듯싶고요. 빈도의 차이일 뿐이지 우리 모두 그런 경험 한 번쯤은 가지고 있으니까.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하니 여러분도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요. (파이팅!)

 

출처: pixabay

 

1951년, 허친스가 시카고 대학 총장에서 물러난 이후 ‘허친스 플랜’ 그 자체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시카고 대학은 기존의 인문고전과 자연과학 서적, 동양의 명저 등을 핵심교양 교육과정에 추가 포함시키며, 유서 깊은 극악의 독서량과 공부량으로 미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교육의 기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대학이 ‘직업학교’ 소리를 듣는 것에 무작정 반기를 빼 들 수 없다는 것이다. 바깥세상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다. 산업의 수요에 부응하는 인재를 키워내라는 무언의 압박이 있다. 손 놓고 있으면 ‘대학이 감히 사회적 책임을 회피한다’는 뭇매를 맞는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더욱 균형점을 찾고자 힘써야 한다. 우주의 시간을 거쳐 정립된 인문학의 가치가 부지불식간에 저물어버리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 고유한 학문의 목적은 인간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우리의 짧은 생도 인문(人文)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 아닌가.

강지은 바람 온라인 저널리스트 yess@li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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