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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속도를 찾아 - 치앙마이의 추억

기사승인 2021.01.25  20:5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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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드물게 한파와 폭설이 가득한 연초다. 코로나와 추위 때문에 집에 콕 박힌 채 스마트폰 앨범 속 사진을 구경했다. 그러다 발견한 재작년 2월의 사진은 그리운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살 에는 추위 대신 피부를 감싸는 뜨뜻한 공기, 한국이 아닌 태국,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걸어 다녔던, 2019년 2월의 치앙마이.

 

친한 친구와 단 둘이 떠난 여행이었다. 우리는 다소 충동적으로 여행하자는 결정을 했고, 다소 충동적으로 여행지를 정했다. 태국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방콕은 왠지 서울과 비슷할 것만 같았다. 조금 더 검색하다 찾은 치앙마이라는 도시는 방콕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다녀온 사람들마다 꼭 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후기가 많았다. 고민하던 우리가 결단을 내린 건 치앙마이를 향하는 비행기가 저렴한 특가로 여행 사이트에 떴을 때였다. 일단 급하게 비행기부터 예매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태국으로 떠났다.

 

 

눈을 떠 코끼리를 바라본 맹인

 

치앙마이 여행 계획을 짜며 참고한 구글맵. 사각형의 성곽이 보인다. / 출처: 화면 캡처

 

2월 말이라는 애매한 시기에 최대한 많이 태국에 머무르고 싶었기에 패키지가 아니라 직접 계획한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난 대학에 입학한 뒤 거의 여행을 간 적이 없었고, 친구와 단 둘이 해외여행도 처음이라서 큰 도전이었다. 또 태국의 이 도시는 유럽이나 중국, 일본처럼 익숙한 느낌은 아니었다. 파리, 뉴욕, 런던, 베이징, 도쿄, 이런 입에 익은 이름이 아니라 치앙마이, 태국 북부에 위치한 제 2도시. 블로그에선 치앙마이를 도시화가 많이 되어 있진 않지만 유적이 많은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라고 묘사했다. 디지털과 유적, 어째 모순적이지만 그게 치앙마이의 특징이라고들 했다.

 

여행계획을 짤수록 코끼리를 더듬는 맹인이 된 기분이었다. 사전에 알고 있는 정보 없이 네이버 블로그와 구글 검색만으로 도시에 대한 이미지를 그렸기에 더욱 그랬다. 사각형 모양의 고대 성곽 안 올드 타운, 성곽 밖 북쪽의 님만해민, 서쪽의 공항 지역, 동쪽의 창끌란과 핑강, 이렇게 성곽을 기준점으로 하나씩 정보를 쌓아 올렸다. 비행기에 탈 때까지만 해도 치앙마이는 2비트로만 내 머릿속에 존재했다.

 

태국 공항의 모습 / 직접 촬영

 

치앙마이 국제공항 밖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 한국의 찬 2월 바람 대신 뜨뜻하고 습한 공기가 제일 먼저 피부에 달라붙었다. 머릿속로만 더듬거리던 치앙마이를 피부로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활자와 사진으로 존재하던 치앙마이가 내 눈앞에 있었다. 

 

 

커리에 코코넛밀크를 넣는 곳

 

왼쪽 - 레몬그라스가 들어간 코코넛 수프. 똠얌과 비슷한 재료가 들어간다. 오른쪽 - 카오써이 / 직접 촬영

 

친구가 내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녁으로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똠얌까이(새우가 주재료인 똠얌꿍 대신 닭고기를 쓴 수프) 때문이었다. 태국에 왔으니 똠얌 수프를 먹어보아야 하지 않겠냐고 강력하게 주장한 친구였었는데 입맛에 맞지 않았나 보다. 다행히도 난 김치찌개와 비슷한 시큼한 맛이 괜찮게 느껴졌다.

 

태국은 우리나라와 기후가 아예 다른 만큼 음식도 낯설었다. 처음 치앙마이에서 사 먹은 저녁은 카오써이라는 국수였는데 매콤해 보이는 빨간 국물과 달리 부드러운 맛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코코넛밀크를 재료로 썼기 때문이었다. 또 어색한 듯 새로운 음식은 그린 커리였다. 마찬가지로 커리에 코코넛밀크를 써서 부드럽고 단 음식이었다. 매콤하고 강렬한 고추 맛에 익숙했던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도 나는 태국 향신료가 꽤 입맛에 맞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익숙한 음식만 먹으면 아깝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의기투합한 우리는 온갖 신기한 메뉴를 시도해보았다. 특히 치앙마이는 집에서 요리하지 않고 음식을 사 먹는 문화가 발달해 있어 이것저것 사서 숙소로 가기에 제격이었다. 새로운 음식을 하나 먹을 때마다 혀끝으로 치앙마이를 배워나가는 느낌이었다.

 

팟타이와 팟씨유 / 직접 촬영

 

한국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태국 음식은 팟타이일 것이다. 그렇지만 친구와 내가 더 좋아한 건 팟씨유라는 요리였다. 비슷하게 면과 고기, 채소를 볶아 나오지만 시큼한 맛 대신 간장 베이스 소스를 써서 물리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여행 내내 팟씨유만 몇 그릇을 해치웠는지 모르겠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밀크티, 로띠, 망고 스티키 라이스. / 직접 촬영

 

또 매일같이 사 먹은 음식은 타이 밀크티였다. 선명한 주황색의 밀크티라니 처음엔 좀 꺼려졌지만 독특한 향과 달콤함에 곧 중독되었다. 길거리 가판대에 타이 밀크티가 보일 때마다 한 잔씩 사서 더위를 식히곤 했다. 연유를 뿌린 크레이프 느낌의 로띠, 밥을 망고와 곁들여 먹는 망고 스티키 라이스도 좋은 군것질거리가 되었다.

 

현지인들이 많이 간다는 생선구이 맛집을 찾아갔을 때 처음으로 쏨땀을 먹어보았다. 누군가의 후기를 보니 파파야를 썰어 만든 김치 같다고 했는데, 매콤하고 아삭아삭한 느낌이 정말 그랬다. 일요일 시장에 방문해서 사 먹은 닭고기 사테 꼬치도 입맛을 사로잡았다. 어떻게 이렇게 먹는 것마다 맛있을까? 태국 음식이 너무나 맛있었던 나머지 여행하던 중에 바로 쿠킹클래스를 신청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다디단 열대과일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자리에서 생과일을 골라 갈아주는 주스 가판대, 생과일을 잘라 파는 가판대를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망고와 수박, 딸기는 물론이고 열대과일인 리치와 잭프룻까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태국에 있어서 행복한 순간이었다.

 

길거리에서 산 생과일주스 / 직접 촬영

 

사원의 나라

 

뭐 이렇게 사원이 많나 싶을 정도로, 치앙마이에는 정말 발길이 닿는 곳마다 사원이 있었다. 태국어로 사원을 뜻하는 ‘왓’(Wat)이 쓰인 표지판을 5분마다 하나씩 볼 수 있었다.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불교 신자라고 하니 당연할 만도 하다. 정교하고, 화려한 사원들은 여행 내내 눈길을 끌었다.

 

왓 프라탓 도이 수텝의 황금 사리탑 / 직접 촬영
화려한 건축이 돋보이는 왓 프라탓 도이 수텝 / 직접 촬영

가장 먼저 찾은 사원은 왓 프라탓 도이 수텝, 금빛 사원이었다. 경사가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입구 안으로 들어가니 온통 금빛이었다. 부처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가운데의 황금 사리탑은 그 규모나 정교함이 압도적이었다. 그 옆에 세워진 건물들도 금박 장식과 금칠로 화려했다. 탑 앞에서 관광객들이 쉴 틈 없이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천천히 탑돌이를 하면서는 금색 탑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였다. 어색한 표정으로 탑 주위를 걷는 외국인들도 있었지만 두 손을 꼭 쥔 채로 탑을 도는 사람, 초를 태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본당의 스님 주위로 사람들이 조용히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금빛 사원이 달리 보였다. 이렇게 부처님의 뜻이 담긴 사원을 지으면서 사람들이 담았을 염원과 믿음은 얼마나 컸을까. 그 마음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화려하고 휘황찬란할까.

 

왓롱쿤의 모습. 오른쪽은 지옥을 형상화한 입구의 조각들이다. / 직접 촬영

 

어느 날은 하루를 통째로 들여 두 개의 사원을 다녀왔다. 이번엔 치앙마이 위쪽 치앙라이 지역으로 향했다. 치앙라이의 왓롱쿤은 오직 하얀 석고와 유리만을 지어 만들어서 ‘화이트 템플’로도 유명하다. 부처님의 지혜와 순결함을 담기 위해 하얀색 재료만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사원의 특이한 점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졌다는 것인데, 치앙라이 출신 예술가인 찰름차이 코싯피팟이 버려진 채 방치된 사원을 구매해서 이렇게 새로이 단장했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대부분 오래 전에 지은 것인데 반해 이렇게 현대에 보시하려고 사찰을 짓다니 신기했다.

 

최근 지어진 사원이라 그런지 왓롱쿤은 일반적인 사찰이나 사원과는 느낌이 달랐다. 들어가는 입구 옆에는 이리저리 뒤엉킨 손 조각물이 많았는데 흉측한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그런 조각은 현생을 지옥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촬영 금지로 내부 사진을 찍진 못했지만 대웅전 내부의 벽화도 일반적인 불교 탱화가 아니었다. 터미네이터, 키티, 배트맨 등 각종 캐릭터가 이곳저곳에 그려져 있기도 했고 기계문명이나 전쟁을 암시하는 그림도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폭발적으로 변화한 현대 세상이 마음의 안정과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 신자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표현한 것 같았다. 비슷하게 파란색을 테마로 지어진 왓롱쓰아뗀, 일명 블루 템플도 잠시 들렸다.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사원을 구경하니 내가 다른 문화권에 왔음이 확 느껴졌다.

 

블루 템플 왓롱쓰아뗀/ 직접 촬영

 

왓 체디 루앙 / 직접 촬영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사원은 왓 체디 루앙이었다. 그냥 별 계획 없이 성곽 내 거리를 이리저리 걷다 들어간 곳이었다. 땅거미가 지는 시간이라 매표소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감시자는 없었지만 사원에 짧은 옷을 입고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매너가 마음에 걸려 대여용 사롱 치마를 걸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왓 체디 루앙의 탑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커다란 석조 불탑이었다. 몇 층짜리 건물 만 한 불탑은 과거 지진으로 상단부가 훼손된 모습이었지만 그 웅장함은 그대로였다.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고 구경하려고 방문한 것이 아니라 발길 닿는 데로 걷다가 갑자기 가보자고 결정한 장소라 더욱 편안한 마음이었다. 분위기도 다른 사원들보다 고즈넉했다. 늦은 시간이라 사진을 찍는 사람도 기도를 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관리가 잘 되고 화려했던 금 불탑이나 새로이 지어진 하얗고 파란 불탑이 아닌, 이끼가 끼고 부스러진 불탑이어서 오랜 과거와 교감하는 느낌이었다. 

 

푸르게 물들어가는 하늘, 가로등 불빛과 달빛이 내려앉은 코끼리 조각상, 한적한 사원의 공기, 한 번도 종교를 가진 적이 없었던 나지만 그 순간만큼은 불교 신도들의 마음을 조금 헤아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속도대로, 마음대로 가자

 

부모님과 함께한 한국 여행은 즐겁긴 했으나 유적과 박물관 방문으로 지치기도 하는 여행이었다. 고등학생 때 다녀온 해외 수학여행은 빡빡한 일정표 속에서 교육적인 목적으로 선정된 장소들을 빠르게 다녀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친구와 떠난 치앙마이 여행은 처음으로 느긋하게 한 도시를 눈과 가슴에 담는 시간이었다. 미리 정한 장소를 모두 방문하고, 최대한 열심히 다 구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는 첫 여행이었다.

 

친구도 같은 말을 했다. 느리게 우리 마음대로 움직이니 너무 좋아. 미리 골라둔 장소를 가기로 한 날도 있었지만 느지막하게 움직이고 싶을 땐 게으름을 피웠다. 우연히 발견한 카페에 들어가고, 우연히 발견한 좌판대의 메뉴를 주문하고, 우연히 찾은 가게에 그냥 방문하기. 어떤 날은 외국인이 운영하는 고서점을 마주쳐 1900년대 중반 인쇄본인 <알함브라 궁전 이야기>를 샀다. 목표가 그저 ‘올드타운 거리 걷기’인 날도 있었다. 원하는 만큼 자유롭고 발걸음이 닿는 대로 발견하는 여행이었다.

 

성곽의 문이자 여행자들의 기준점인 타패 게이트 앞. / 직접 촬영

 

일주일 동안 한 도시에 머물면 질리지 않을까 했던 걱정도 기우였다. 오히려 일주일로는 부족했다. 코끼리를 더듬던 나는 비행기에서 내려서는 코끼리를 보았고, 이제 조금씩 그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행객의 무지와 도시에 대한 익숙함이 적절히 섞인 그 느낌이 좋았다. 일주일이 끝나갈 땐 타패 게이트(성곽 출입구)가 친근했다. 여행을 시작할 때는 설명 몇 줄, 사진 몇 장이던 치앙마이는 이제 내가 아는 지구의 한 장소였다.

 

치앙마이는 시간을 여유롭게 흘려보내는 방법을 처음 배운 곳이었다.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잘 짜인 계획 없이 돌아다녀도 꽤 괜찮다는 것을 배운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으로 ‘여기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곳이기도 했다. 좀 더 시간을 들여서 이 도시를 알고 싶었다.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이 아니라 도시 구석구석을 정말로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시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치앙마이의 거리를 걷고 싶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피부를 뜨뜻하게 감싸는 공기를 느끼고 싶다. 그리고 지금 내가 조금 잊어버린, 느긋하고 자유롭게 시간을 즐기는 법을 다시 배우고 싶다.

 

송휘수 지속가능저널 인턴 기자 yess@live.com

<저작권자 © 지속가능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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