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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싶은 여행을 기억하는 법

기사승인 2018.02.07  12: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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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행선지 다음으로 패키지여행인지, 자유여행인지를 묻는다. 난 그 물음의 저의를 알고 있다. 전자라고 답하면 일제히 하나도 부럽지 않다는 표정으로 나를 비웃으리라. 내가 지금까지 다녀온 여행은 모두 가족과 함께 한 패키지여행이었고 이와 같이 답하면 여행을 떠나는 입장인데도 묘한 패배감에 휩싸여야 했다. 질문한 이의 말려 올라간 입 꼬리가 나를 조롱했다. “패키지여행이라니 이런 여행의‘여’자도 모르는 사람!”괜스레 귀가 간지러웠다.

또래 친구들에게 자유여행은 일종의 ‘멋’이고 특히 혼자 자유여행을 가는 것은 그 ‘멋’의 최고봉에 있었다. 온전히 자신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능동적인 여행이라니 YOLO의 삶을 꿈꾸는 청춘들에게 그보다 부러운 테마는 없을 것이다. 나를 위한 여행이 진정한 여행이라고들 하니까. 그러나 자유여행은 일반적으로 패키지여행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들고 모든 일정을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혼자 가는 자유여행이 동경의 대상이 된 것은 모두가 자유여행을 위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되지 않으며, 설령 갈 수 있다 하더라도 혼자 여행 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리라.

나 역시 혼자 여행을 다녀올 용기가 없었기에, 첫 자유여행은 언니와 함께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틈나는 대로 마주 앉아 계획을 짜며 몇 주간 인고의 시간을 보냈고 2주간의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비로소 나는 자유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되었다. SNS에 잘 나온 여행 사진들을 업로드 하니 친구들의 부러움 가득한 댓글이 잔뜩 달렸다. 생각과 달리 마냥 흡족하거나 벅차지 않았다. 오히려 한껏 멋들어진 사진들을 볼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렇게 미국여행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 봉인시켜뒀다가 몇 달이 지난 지금 다시 헤집고 있다. 어쩌다 아래 글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마친 후 한 두 달쯤 지나고 여행기를 쓴다. 그동안 가라앉아야 할 것은 가라앉고, 떠올라야 할 것은 떠오른다. 그리고 떠오른 기억만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가는 것이다. 잊어버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루키의 여행법」 中

내 상황과 맞닿아 있어 그런지 하루키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그대로 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떠오르는 기억들만 모아봤다.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의 그 설렘과 그 감정을 빼곡하게 적어 둔 노트, 낯선 풍경과 음식,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 인생 사진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시작은 걱정보다 설렘으로 가득했다. 순간의 감정들을 기록하려고 노트와 펜도 챙겼다. 긴 비행시간을 영화 두 세편으로 때우던 지난 여행들과 차이를 두고 싶었다. 미국 안에서도 도시를 옮겨 다니느라 비행기만 일곱 차례를 탔는데, 그때마다 최대한 시간을 버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뭔가를 썼고 지치면 눈에 담긴 것들을 정성들여 그렸다. (추측할 수 있겠지만 가장 선호하는 자리는 창가 자리다.)

 

​미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간 도시는 워싱턴이었다. 수도답게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백악관, 국회의사당, 박물관 단지들, 링컨 기념관 등 멋지고 의미 있는 곳들을 다녀왔지만 내 기억에 박제된 워싱턴은 연필 모양의 워싱턴 기념탑과 그 앞에 펼쳐진 널따란 잔디밭이었다. 촉촉한 잔디에 파란 가을 하늘이 어우러져서 무채색 건축물들에 생기를 더했다. 그 평화로움은 미국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가 되었다.

워싱턴과 달리 뉴욕은 화려하고 정신없는 곳이었다. 평소에 시골보다 도시를 선호한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고쳐먹는 계기가 되었다. 타임스퀘어는 듣던 대로 화려하고 야경은 눈을 뗄 수 없게 아름다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체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영화에서 자주 봤던 풍경들이 신기하긴 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를 봤는데 배경이 익숙해서 정말 내가 뉴욕에 다녀왔구나 싶기도 했다.)

 그 정신없는 뉴욕에서 가장 마음에 든 공간은 센트럴파크였다. 시간이 되는대로 들렀고 피크닉도 하면서 그 순간을 담으려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던 기억이 난다. 여행자인지 현지인인지 모를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잔디밭에 누워있었고 그들을 구경하며 커피와 베이글을 먹었다.

 

 자유여행 오면 꼭 그 나라의 대중교통을 이용해보고 싶었다. 패키지여행에서 절대 경험하기 힘들기도 하고 뭔가 현지에 녹아든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뉴욕 지하철은 악명 높아서 무서웠지만 막상 타보니 편하고 신기했다. 낮은 계단과 스크린 도어 없이 아찔한 선로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지하철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걸어서 국경을 넘던 기억도 떠오른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미국에서 캐나다로 건너갔다. 우리나라는 현실적으로 섬과 같은 상황이라 비행기나 배가 아니면 국경을 건널 수 없기 때문에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는 게 씁쓸하면서도 참 신기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대한 별 기대가 없었는데 정말 감탄만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미국여행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떠오르는 기억들은 이렇게 많았고 그 기억들을 이어보니 꽤나 멋진 여행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밝기만 한 여행으로 매듭짓는 일은 얼핏 쉬워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루키는 여행 후 가라앉을 기억들은 가라앉는다고 했다. 잊어버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그러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정말 다 잊을 수 있는가. 나에게 가라앉히고 싶은 기억들은 많았지만 스스로 가라앉아주는 기억들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러려고 할수록 더 선명하고 강렬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

​여행에서의 모든 순간이 좋았을 리 없다. 분명 끔찍한 순간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사람에 관련된 것이었다. 보스턴에서 흑인들에게 희롱 섞인 위협을 당하기도 하고, 조용하고 깜깜한 워싱턴 거리에서 노숙자들에게 스토킹을 당해 근처 맥도날드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낯선 외국인들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여행을 함께 한 언니였다. 성향이 정반대인 언니와 나는 사사건건 부딪혔고 말싸움을 하다가 여러 번 울었다. 특히 가장 오래 머문 뉴욕은 괴로운 기억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타임스퀘어 한복판에서 새벽까지 싸우느라 다음날 일정을 망쳐버리기도 했다. 2주 동안 좋든 싫든 서로가 유일한 말상대였기에 자연스럽게 기분이 풀려 한국에 돌아왔지만, 결국 미국여행의 일면은 내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쓰라린 기억으로 남았다.

​이렇게 아픈 기억들이 고스란히 있는데도 우선적으로 떠오른 기억들이 대부분 좋은 것들인 걸 보면 난 미국여행을 애써 좋은 기억으로 포장하고 싶은 가 보다. 시간이 지날 만큼 지났으니까, 힘들었어도 좋은 경험이었으니까. 자기합리화를 하지만 속으로는 가슴에 남은 슬픈 기억들에 괴로워하고 있다.

​여행의 모든 기억을 솔직하게 수면 위로 꺼내 올린 후에야 내가 여행 사진을 보면서 느꼈던 복잡하고 불편한 마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이질감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사진 속의 나는 완벽하게 여행을 즐기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 순간 많이 괴로웠었다. 그래도 지인들이 여행이 어땠냐고 물으면 그저 좋았다고만 했다. 내 첫 자유여행이 불완전한 보여주기 식 여행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떠올리고 싶은 순간이 있는 반면, 가라앉히고 싶은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동안 나는 기억하기 싫은 순간들을 외면해왔다. 나는 행복한 기억만 안고 가고 싶은데 슬픈 기억이 끼어드는 게 불편했다. 그러나 슬픔은 분명 그만의 가치가 있다. 슬픔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어 궁극적으로 진정한 기쁨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성숙의 진정한 의미는 내 안의 슬픔을 무시하고 기쁨으로 위장하는 것이 아닌 내 안의 슬픔을 인정하고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에 있다.

나는 여행의 아픈 기억을 마주함으로써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여행지에서 먹는 것보다 보는 것을 더 중요시하고, 시끄러운 번화가보다 평화로운 공원을 더 좋아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여행을 통해 잊고 싶은 일을 나만의 방식으로 기억하는 법을 배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식의 대처 대신, 고난의 순간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왜 그랬는지, 얻은 점은 무엇인지 차곡차곡 써나갔다. 비로소 여행이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되었다.

결국 패키지여행인지 자유여행인지는 관계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여행을 통해 성장했는가의 여부다. 그 점에서 자유여행이 더 성장가능성이 높은 여행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여행의 의미를 찾을 때 누군가와 함께한 여행이 진정한 의미의 여행일 수 있는지 여전히 회의감이 든다. 아무리 자유여행이라 한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한 시간이 없었다면 그저 구경, 관광만 하고 온 것은 아닌지. 다음 여행은 혼자 떠나보기로 다짐한다.

 

​미국여행을 다녀온 지 두 달이 되어가는 어느 날 저녁, 집에 가기위해 강남역을 향해 걸어가는데 불현 듯 뉴욕의 밤거리가 겹쳤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강남역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렴 어떤가. 이제 아픈 뉴욕의 기억들도 여행의 한 풍경으로 남아있다. 여행지에서의 일은 모두 한낮의 꿈같아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독 밝은 달이 같았기 때문일까. 공간은 달라졌지만 뺨에는 닮은 바람이 스쳤다.

신희수 

지속가능저널 csr@csr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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